1. 하얗게 타오른다 스러지지 않는다 그 불꽃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꿈꾼다 아 사랑 없는 혁명은 얼마나 헛된 몸부림이었던가 어리석음을 탓하던 그 시절 나의 생은 얼마나 서툴렀던가 하지만 지혜는 항상 내 안에 있었으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땐 어떻게 깜깜한 밤길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는지 간신히 숨을 쉬는 지금도 그런 어둠 속인데 깊은 골짜기에서 끄덕이게 된다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그렇게 어두웠구나 그래서 그렇게 선명했구나 참 다행이다 참을 수 없이 아프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진 않지만 곧 날이 밝아 올 거야 기분 좋은 날이, 할 수 있는 걸 맘껏 해도 널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날이 곧 밝아 올 거야
2. 아무리 꼭꼭 숨어도 우연은 물결처럼 날 찾아오고 스르르 스르르 하얗게 하얗게 사방을 물들인다 그래 시는 위안을 주지 않는다 쓰고 나면 하얀 점이 되어 읽을 수도 없는 시 어차피 무용할 바에야 의도적으로 무용해지자 그렇게 마음먹자 존심이 스르르르 나를 우빈다 싱크홀,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냥 두라는 말 허덕지덕 첨벙이지 말고 저만치 바라보라는 널 그래 그런 날 감싸 안는 날 차마 바라보지 못했던 하늘을 내가 사랑한 벽을 지척에 두고도 닿지 않는 너를 난 차마 쓸 수 없었다 아 애매함을 견뎌내는 천부적인 선수여 괴로워 말라 생은 하나의 비트와 수많은 변주들 오늘은 그중에 한 결이 아니더냐 하여 기억이여 안녕하라 이젠 읊조릴 수도 없는 이름이여 아련하라 그리고 모두 평안하라
3. 어깨에 힘을 뺐다 가마득히 추락했다 이 어둠이 끝인지 아니면 그 너머에 뭐가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빛에 대한 애착, 하지만 어느새 어둠도 사랑해버린 난 벗어나려고 버둥질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잠할 뿐 인내할 뿐 깊이 빠져들었다 가끔 침묵이 찾아와 말동무해주면 썰렁한 농담으로 화답했다 외롭구나 아니 그립구나 눈을 감아야 보이는 네가 당신과는 모든 일이 처음 같았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얘기도 하늘거리는 손짓도 햇살같이 퍼지는 미소도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도 매번 어찌 그럴 수 있었는지 어찌 그리 매 순간 새로울 수 있었는지 마치 다른 시공간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난 꼭꼭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저기 있다' 소리쳐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내 맘은 하얗게 재가 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애당초 비바람에 고개 숙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4. 비밀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래야 생이 지루하지 않을 테니까 푸른 수의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고는 끝이 없을 거 같은 좁은 길로 밥차를 밀고 갔다 살다 보면 함께 해서 좋은 일이 있지만 혼자 인내해야 할 일이 있다 내 안의 너 그리고 네 안의 나를 어둠 속에서 남몰래 감내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생의 질고를 겪은 노인네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가 한 집에 살았다 커피와 탄산수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던 둘은 이제 데면데면 밥상머리에 같이 앉아 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바다처럼 슬프고 사람처럼 아름다운 것을 일상에서 깨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번 켜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이렇게 노인네와 아이가 함께 웃기는 처음이었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