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재밌는 거야?(1) 난 섬에 가서 굶어 죽을 거야 라고 말하는 너보다 뭔 소리야? 라고 묻는 대신 언제? 라고 묻는 내가 더 섬뜩했다 넌 대답했다 십이월! 12월? 그땐 혼자 추울 텐데 야, 굶어 죽기 전에 먼저 얼어 죽는 거 아냐 이쯤 되면 알겠지? 다 농담이고 난 네가 죽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는 걸 추운 건 싫은데... 그래, 너 추운 거 싫어하잖아 12월은 안 돼 그럼 언제? 갑작스런 너의 질문에 난 당황했다 언제? 언제냐고 가만있어 보자... 그게 그러니까... 유서 먼저 써야 되지 않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유서? 그래, 죽는다며 죽기 전엔 보통 유서를 남기잖아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유서라는 말에 넌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 침묵에 숨이 막히는 거 같기도 하고 차오르는 거 같기도 했다 그녀가 물었다 자야 된다면 반드시 자야 된다면 넌 유서를 쓰고 잘 거야, 아니면 일단 자고 나서 쓸 거야? 그 순간 난 널 꼭 껴안고 싶었다 항상 잠이 모자란다고 힘들어하던 너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아 좀 잘 챙겨 먹으라고 그렇게 잔소릴 해댔는데 야, 근데 이거 뭐야?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가 또 물었다 펼쳐져 있는 내 수첩을 본 것이다 아니 뭐 좀 쓰는라고 이거 재밌는 거야? 아니 그냥... 그녀는 수첩을 가져가 한동안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다 관심이 가는 거엔 순간 몰입해 무릎이 타들어가 물집이 생기는 지도 모르던 그 나 이거 내 유서로 할래 뭐, 뭐라고? 이게 왜 니 유서야? 니가 내 유서를 쓴 거야 날 위해 뭔 개소리야? 내가 왜 니 유서를 써? 넌 니가 하는 모든 일을 알아? 그러니까 그 의미랄지 인과랄지 그런 거 K는 여기까지 쓰고 서둘러 폰을 닫았다 이미 버스는 판교를 지나 고속도로에 올랐다 곧 한남대굘 건널 테고 남산 터널을 지나면 바로 내려야 했다 자야 할 시간에 글을 쓰다니 잠보다 글이 우선인 건 처음이었다 사실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는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자야 하는데... 자야 하는데... 가 전부였다
이거 재밌는 거야?(2) 앞이 깜깜해 마치 블라인드같이 떠도 감아도 감고 싶을 뿐야 온통 빛이지만 나에겐 빛이 없어 죽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었다 자 이제 유서도 있겠다 뭐가 더 필요하지? 어둠! 난 작은 소리로 외쳤다 어둠! 말하고 나니 세상에 이처럼 멍청한 말이 또 있나 싶었다 빛이 없다는 이에게 필요한 게 어둠이라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내 말을 되뇌었다 어둠... 어둠... 어둠...이라 그녀는 빛이었다 그저 환한 정도가 아니라 자체로 빛이었다 그러니 어찌 더 빛을 더하겠는가 온통 빛이지만 나에겐 빛이 없어, 란 그런 뜻이었다 근데 어둠은 어디 있지? 그녀가 물었다 니 앞에 있잖아 내 앞? 너? 빛 앞에 어둠이 서 있다니 K는 그 장면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K 역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것도 로또는 꽝이었고 내일은 월요일,이라고 할 때 그 월요일 또 내가 아는 건 이미 새벽이라는 거 내일은 아니 오늘은 오늘보다 아니 어제보다 더 하드한 날이 될 거라는 거 앞이 깜깜해 마치 블라인드같이 사실 이 대사는 원래 내 대사였다 그녀가 먼저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꼬인 거다 K는 앞니로 오른 손등을 살짝 깨물었다 잇몸의 염증이 삼일 째 가라앉지 않아 약간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야 한다 눈을 감은 동안 발은 더 차가워질 터이고 그러면 죽고 싶다는 그녀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기에 K는 오늘 밤도 쉽게 잠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창문을 닫지 않았다
이거 재밌는 거야 (3) 날이 흐린 거야 창이 뿌연 거야 달리는 버스 안이야 바이바이 손 흔드는 가로등이야 열기엔 날카롭고 닫기엔 답답하고 왼쪽 뒷골이 땡겨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배에서 꾸룩 소리가 났어 이 와중에 배까지 고픈 건가 k는 생각했지 어서 삼 편을 써야지 하면서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어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에 응 괜찮아 넌 잘 하고 있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니면 아니야 이대론 안 돼 뭔가 돌파구가 필요해,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녀의 말에 난 뭐라 답해야 하나 난독증을 이기려 손가락을 곧게 펴 행간을 문질렀어 기껏해야 두세 줄 다시 숨을 숴야 했지 난서증이라는 것도 있어 하지만 키보드가 있어 드러나진 않았어 결국 손가락과 키보드가 요즘 나의 발버둥이고 몸부림이야 날이 흐린 거야 창이 뿌연 거야 여기는 달리는 버스 안이야 버스는 멈춰 섰다 달리고 멈춰 섰다 달리고 그렇게 종점까지 가 가만있어 보자 난 종점 두 정거장 전에 내려야 하는데 내려서 네발로 다시 걸어야 하는데 커피 대신 물, 알지? 창에 비친 눈이 말했어 그래, 커피 대신 물 그 눈을 바라보며 내 눈이 대답했지 대답할 말은 정했어? 글쎄 (......) 아무래도 난 커피야 대신 커피에 물을 좀 타서 마실게 어느새 난 싱겁게 걷고 있었다 대답할 말은 정했냐고? 너무 그렇게 다그치지 마 커피처럼 쉬운 대답이 아냐 심란과 멍 때림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니 멀티태스킹은 이제 무리구나 k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