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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교 시집, 아직 아침 식사 전입니다, Chung Pan Gyo Poetry, 종일행지자(1)(2)

by 디올뉴 202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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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행지자(終日行之者) (1) 종일 하는 일은 날 재우는 일 시 뭉텅이를 툭 던져두고 창문 틈 햇살을 피하는 일 음지에 눕는 일 핏빛 찻물을 휙 뿌려 봄의 꽃을 태우는 일 받은 적 없는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는 일 졸이고 졸여 짠해진 된장국을 한술 뜨는 일 늙은 세탁기를 손수 돌리는 일 빈 쌀통을 박박 긁어 밥 짓는 마법을 부리는 일 근데 시란 참 이상해 면죄부 같거든 갚지도 않았으면서 내빼는 이방인으로 살다가 결정적일 땐 선민(選民)인 척 혹 이 길로 지나다가 구겨진 시를 보거든 못 본 척 손으로 쓱 지워 주게나. -------------------------- 종일행지자(終日行之者) : 종일 -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 그것을 행하는 사람 선민(選民) : (기독교)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택한 민족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를 이르는 말

 

종일행지자(終日行之者) (2) 종일 전능자의 손길을 느끼는 건 희열이었지만 전능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나의 욕심은 한량없었고 그래 이렇게 어중간할 바엔 아예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보자 결단해도 몸은 천근이라 발은 꿈쩍도 안 했는데 희열과 맞바꾼 것들 그러니까 더 큰 희열을 외면하고 얻은 것들은 잡다하게 쌓여 갔고 나는 힘겹게 이것도 메고 저것도 끌고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신인(神人)이라도 만난다면 발치에서 영원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나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뭐라고 저를 부르시나요. 부유(浮遊)하는 티끌인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척에 능할 뿐 온통 가짜투성인데 왜요? 나는 내가 잘 아는데 어찌 절 아신다고 지나가는 길에 자꾸 부르십니까? 지금은 사라진 도서관 그곳에서 불완전한 시 한 편을 본 적이 있다 순경(順境)의 고난이라니 여정이 도(道)라니 길은 다 목적지가 있는 거 아니었던가. 되레 역경(逆境)이 고난이 아니었던가. 이 번뇌진창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끝이라도 있어야 길을 나선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여보세요. 그럼 내비도 필요 없는 거잖아요 한 마디 갈기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죽음이 지척에서 스멀스멀 희롱하기 시작했다 난 너무나 괴롭고 성가셔 손바닥으로 쓱 지워버리고 말았다 -------------------------------- 종일행지자(終日行之者) : 종일 -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 그것을 행하는 사람 언감생심 :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냐는 뜻으로,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음을 이르는 말 신인(神人) : 신과 같이 신령하고 숭고한 사람 부유(浮遊) : 행선지를 정하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님 순경(順境) :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 역경(逆境) : 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 번뇌 :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 진창 : 땅이 질어서 질퍽질퍽하게 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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